국민대학교 유라시아 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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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리자   Date : 2009/08/04  Hit : 5108  
 러시아 문단의 ‘악인’ 보리스 아쿠닌 - 이형숙

 

러시아 문단의 '악인' 보리스 아쿠닌

이형숙
 
 
 
러시아 문단의 ‘악인’ 보리스 아쿠닌 지난 겨울에 우리나라를 찾았던 작가 소로킨은 한국의 문학연구자들과 함께 한 자리에서 가장 좋아하는 작가가 누구냐는 질문을 받자 거리낌 없이 “레프 톨스토이”라고 답했다. 나를 포함해서 그 자리에 있던 많은 청중은 순간 웃음을 터트렸는데, 그 짧은 웃음과 더불어 서서히 퍼져나가던 파장의 실체는 바로 아이러니였던 듯하다. 현대 러시아의 많은 작가들이 언어와 소재와 형식의 파격을 통해 20세기 전반까지 자국의 문학을 지배했던 이른바 ‘고급문학’에 대한 반감을 표현하는 것은 이미 낯선 풍경이 아니다. 고리끼가 “우리의 문학은 우리의 자랑”이라고 당당하게 주장했던 19세기 러시아문학의 정신에 대해 소로낀 역시 “우뢰를 머금은 먹구름 같은 관념들”이라며 거부감을 나타냈다. 그렇다면 개인의 몸과 영혼의 자유로운 날갯짓을 가로막는 이념과 사변들에 대해 향수를 품지 않는 것과, 톨스토이에게서 자신의 또 다른 문학적 자아를 발견하는 것 사이에는 어떤 ‘러시아적 공감’이 있는 것일까? 포스트소비에트 문학장(場)에서 가장 눈에 띄는 변화의 예로 흔히 주류문학이 담아내지 못했던 대중 혹은 ‘다중’의 삶과 감정의 영역을 끌어안는 경향이 이야기된다. 대중적 취향의 확대와 더불어 러시아의 토양에서 주변으로 치부되어 온 대중문학과 주류문학 간의 ‘경계’도 유연해지고 있다. 소로낀의 예가 주류문학 내부에서 금기의 영역을 깨뜨리는 경우라면, 추리소설이라는 대중문학 장르를 중심으로 다양한 문화영역을 넘나드는 작가는 보리스 아쿠닌이다. 아쿠닌은 러시아와 유럽과 미국 등지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누리는, 현대 러시아 문단에서 보기 드문 이른바 ‘슈퍼 유행’ 작가이다. 10권이 넘는 ‘에라스트 판도린의 모험’ 시리즈는 러시아에서만 1,200만부 이상 팔렸고, 30여 개 국의 언어로 번역되었다. ‘수녀 펠라기야 시리즈’의 인기와 더불어 ‘전국의 아쿠닌화’, ‘아쿠닌 현상’ 등의 유행어가 생길 정도로 러시아 전역에 열풍이 불었고, 그의 펜이 잉태한 판도린이라는 인물은 ‘러시아의 셜록 홈즈’로 불리고 있다. <외국문학>지의 부편집장으로 일하면서 미시마 유키오와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들을 러시아어에 소개한 번역자이자 문화학자, 『작가와 자살』이라는 저서를 쓴 문학평론가로서 아쿠닌은 대부분의 전업 추리소설 작가들과 달리 탄탄한 인문학적 기반 위에서 창작활동을 해오고 있다. 그루지야 출신인 그가 ‘그리고리 샬보비치 치하르티슈빌리’라는 본명을 버리고 ‘아쿠닌’이라는 필명을 쓰기 시작한 것은 1997년 ‘B. 아쿠닌 프로젝트’에 착수하면서부터이다. 이 프로젝트는 추리소설 분야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아쿠닌은 2000년에 체홉의 희곡 『갈매기』에 자신의 해석을 담아 완결된 형태로 출판했고, 2005년에는 ‘장르들’이라는 제목으로 『아동서적』, 『스파이소설』, 『판타지』 등 세 권의 소설을 동시에 출판하기도 했다. 한편, 필명을 내세워 작품 활동을 시작하는 이유에 대해 아쿠닌은 “부와 명예를 위해서가 아니라 이전까지 러시아에 존재하지 않았던 무언가를 이루기 위해서.”라고 밝힌 바 있다.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그는 고급한 문학과 저급한 문학 사이에 ‘중간 장르’를 만드는 것에 대해서도 흥미를 느껴보았지만, 그것 역시 가장 본질적인 해결책은 아니었다. 오랜 숙고 끝에 그가 얻은 결론은 “자유, 양심, 자존감 그 어느 것도 희생하지 않고, 게다가 힘들게 일하지 않고 즐기면서 그것을 이루는 것”이었다. 작가로서, 흔히 이상으로 그치기 쉬운 비현실적인 구상의 과정에서 아쿠닌은 마침내 자신의 창작 열망이나 세속적 야망보다 더 큰 무언가를 발견했다. 작가는 그것이 바로 “러시아 민족의 꿈”이라고 단언한다. 그럼에도 아쿠닌은 한 인터뷰에서, “나를 알렉산더 뒤마, 코난 도일, 스티븐슨 같은 작가들의 후예로 여겨주기를 바란다. 진지한 작가 군(群)에 나를 끼워 넣고자 하는 야심은 내게 없다.”고 고백한다. 이 말에 진실이 온전히 담겨 있을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지만, 아쿠닌은 역사적 탐정물 혹은 스파이소설에 문학성을 훌륭하게 가미함으로써 포스트모던의 시대에 고전의 위상이 퇴색되지 않게 만들었다. 이런 그의 행보를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는 이들은 그가 모든 문학 장르들을 다룰 능력이 있음을 과시하고 싶어 한다고 폄훼하기도 한다. 혹은 그의 모든 ‘새로운’ 주인공들이 본질적으로 소비에트문학에서 잉태된 것으로 미루어 볼 때, 마침내 소비에트시대를 상대로 유희를 벌일 때가 왔다고 결심한 것인지도 모른다. 조금 더 긍정적인 눈으로 바라본다면, 그가 다른 시대로부터, 다른 의식으로, 다른 장르로 기존의 문학을 되돌아봄으로써 새로운 ‘시선’을 얻기 위해 누구보다 더 진지하게, 현실적인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개인의 삶의 애환과 세속적 욕망을 노래하는 대중문학이 설 자리를 찾을 수 없었던 러시아 문단에서 스스로 ‘악인’(아쿠닌이라는 필명은 일본어로 ‘악인’을 뜻한다.)의 역할을 자처한 것은 그야말로 커다란 용기가 아닐까?   러시아와 유럽에서 아쿠닌은 흔히 고골과 톨스토이, 그리고 아서 코난 도일 등에 비견된다. 어떤 비평가의 말대로, 아쿠닌은 “고전으로 가는 길”이다. 그의 모든 작품은, 추리소설마저도, 고전의 분위기로 양식화 되어 있다. ‘고전들의 컬렉션’이라고 할 수 있는 그의 많은 작품들 가운데 대표적인 추리소설 두 권(『아자젤의 음모』, 『리바이어던 살인』)이 마침내 국내에서도 번역이 되었다. 정통 추리소설의 모방과 변주, 장르 간 크로스오버, 순수문학과 대중문학의 경계 파괴, 무엇보다도 ‘대중’이라는 개념을 통속적이라거나 저급하다는 의미로 이해하지 않고 대중문화를 다수가 폭넓게 공감하는 문화로 격상시키는 필력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모든 수식어들을 무색하게 만드는 정의는 한 마디로, ‘재미있다’는 것이다. 노회한 중년 작가의 짓궂은 트릭, 영리하고 정교한 미스터리, 그리고 고전에 대한 오마주를 통해 지적 호기심마저 채워주는 산뜻하고 유쾌한 몰입의 경지 ― 지금껏 러시아문학작품을 읽으면서 좀처럼 만나보기 어려웠던 세계가 펼쳐진다.
 
 

<인터넷 칼럼>에 게재된 내용은 필자의 개인적인 의견으로

유라시아 연구소의 공식견해가 아님을 밝혀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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