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대학교 유라시아 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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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리자   Date : 2009/07/09  Hit : 5978  
 테러(리즘)의 정치사: 프랑스, 러시아 그리고 한국 - 양승조

 

테러(리즘)의 정치사 : 프랑스, 러시아 그리고 한국                                                                            

양승조 (숭실대학교)
 
지난 2007년 8월, 한 외국인 학자의 강연을 계기로 ‘테러(리즘)’과 관련하여 작은 소동이 있었다. 사건을 소개하면 이렇다. 한국 근대사를 연구하는 런던 대학의 한 교수가 국내에서 있은 한 강연에서 한국근현대사를 강의하던 중, 독립운동사 부분에서 김구를 포함한 한인애국단을 테러리스트 그룹으로 분류하여 설명하였다. 항일운동의 중심인물들 중 한 명인 김구를 ‘무자비한’ 테러(리즘)과 연결하는 이러한 설명에 대해 일부 언론을 포함한 많은 한국인들은 우리나라에 대해 무지한 한 외국인 학자의 편견으로 치부하며 거부감을 표시하였다. 이러한 반응이 주류를 이룬 것은 이라크 파병 이후 발생한 한국인에 대한 수 차례의 테러, 특히 같은 해 7월 아프가니스탄에서 일어난 한국인에 대한 테러로 사람들이 테러(리즘) 문제에 민감해져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더 큰 이유는, 미국에서 발생한 9.11테러 이후 사람들이 테러 및 테러리즘을 ‘특정 종교나 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비합법 단체가 저지르는 민간인에 대한 폭력행위’로, 주로, 생각하게 되었다는 데 있을 것이다. 그러나 테러리즘의 역사는, 테러리즘이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간단명료하거나 단순한 현상이 아님을 보여주고 있다. 테러리즘에 대한 정의는 학자들 사이에서도 아직 완전히 동의되고 있지 않지만, 한 국어사전에 나와있는 다음의 정의는 다수가 동의할 수 있는 가장 협의의 의미가 되지 않을까 한다. 이에 따르면, 테러는 “폭력을 써서 적이나 상대편을 위협하거나 공포에 빠뜨리게 하는 행위”이며, 테러리즘은 “정치적인 목적을 위하여 조직적•집단적으로 행하는 폭력 행위. 또는 그것을 이용하여 정치적인 목적을 이루려는 사상이나 주의”이다. 즉, 테러리즘은 ‘(테러)행위의 주체가 폭력의 사용을 통해 사람들 사이에서 공포심을 일으킴으로써, 원하는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려는 행위나 사상’을 의미한다. 이러한 의미에서의 테러리즘이 처음 등장한 것은 프랑스대혁명기이다. (국가)권력에 의한 테러 프랑스대혁명은 편의상 크게 세 시기로 구분할 수 있다. 1789년 7월 14일 부르주아지를 포함한 제 3신분이 혁명을 일으켜 불합리한 구체제의 신분질서를 무너뜨리고 정권을 장악한 ‘1기’, 혁명세력 중에서 보다 급진파인 자코뱅이 상퀼로트라는 파리 서민층의 지원을 등에 업고 온건파인 지롱드를 숙청한 후 급진적인 개혁을 수행하는 ‘2기’, 온건파가 테르미도르의 반동으로 로베스피에르를 숙청하고 총재정부를 수립한 ‘3기’이다. 이 중 테러리즘과 연관이 있는 것은 두 번째 시기이다. 자유, 평등, 형제애로 대표되는 프랑스대혁명의 이념과 이에 따른 사회-정치 개혁은, 국내에서는 봉건적인 구 지배세력의 반발을 가져왔고, 국외에서는 전제군주정 체제하에 있었던 유럽국가들의 군사적 위협을 초래하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국정의 주도권은 미온적인 지롱드에서 급진개혁을 추구하였던 자코뱅에게 넘어가게 된다. 자코뱅이 정권을 장악한 ‘2기’는 ‘공포정치’(la Terreur) 시기라고 불리는데, 그것은 로베스피에르를 수장으로 하는 공안위원회가 정국을 장악하고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테러를 하나의 정책으로, 의도적으로, 사용하였기 때문이다. 즉, 공안위원회는 체포, 구금, 처형 등의 방법을 사용하여 정적을 비롯한 반대세력들을 무자비하게 탄압하였으며, 이를 통해 사람들 사이에 공포감을 조성함으로써 정권을 유지하였다. 테러리즘이라는 용어는 여기에서 기인한다. (국가)권력에 대한 테러 그 기원상 국가테러의 의미를 가지고 있었던 테러리즘에는, 시간이 흐르면서, 무력에서 열세인 개인이나 집단이 특정한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목적을 알리거나 달성하기 위해 사용하는 폭력행위라는 의미가 덧붙여지게 되었다. 일 예로, 19세기 후반 러시아에서 테러를 통해 사회변혁의 달성을 추구한 ‘인민의 의지’를 들 수 있다. 인민 속으로 들어가 계몽을 통해 농민을 각성시키려는 시도가 큰 결실을 맺지 못하자, 인민주의자들 중 일부는 ‘인민의 의지’(Народная воля)를 결성한다. 이들은 인민의 적, 즉 러시아 사회의 지배집단인 짜리와 귀족 지배층에게 테러를 가함으로써, 한편으로는 구체제에 타격을 가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대중을 각성시키려 하였다. 1861년 농노해방령을 통해 위로부터의 개혁을 시도한 알렉산드르 2세에 대한 테러는 이러한 생각이 실천된 대표적인 예이다. 1881년 3월 1일(신력 3월 13일) 일요일 오후 2시, 정무를 마친 알렉산드르 2세를 태운 마차는 예카테리나 운하(Екатеринский канал)를 지나고 있었다. 이 때 주변에 운집해있던 사람들 속에서 폭탄이 날라왔다. 굉음과 함께 마차가 부서지고 수행원 몇이 다쳤다. 그 와중에 별다른 상처를 입지 않은 알렉산드르 2세는 마차에서 나와 “신의 가호로 무사할 수 있었다.”고 말하며 안도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말이 끝나자 마자 다른 한 사람이 자살폭탄테러를 감행하였다. 이번 폭발로 ‘짜리-해방자(Царь-Освобадитель)’는 두 다리가 잘리는 큰 부상을 입었으며, 두 시간 여가 지난 후 출혈과다로 인해 사망하였다. (후에 밝혀졌지만, ‘인민의 의지’ 측에서는 총 네 명이 폭탄을 지닌 채 군중 속에서 짜리의 마차가 다가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 테러의 현장에는, 후에, (알렉산드르 2세의) ‘피 위에 세워진 구세주 성당’ (Храм Спаса на Крови) 혹은 ‘피 위에 세워진 그리스도 부활 성당’ (Храм Воскресения Христова на Крови)이 세워져, 그 날의 사건을 전해주고 있다. ‘인민의 의지’는, 알렉산드르 2세가 전임자인 니콜라이 1세와는 달리 개혁정책들을 수행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테러의 주 대상으로 삼았는데, 그 이유는 이 둘 사이에는 서로 받아들일 수 없는 정치적 차이가 존재했기 때문이다. 즉, 알렉산드르 2세는 개혁을 통해 짜리를 중심으로 하는 ‘제정’ 러시아의 강화를 추구하였던 반면, ‘인민의 의지’는 권력을 러시아 인민대중에게 돌려주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소수의 음모자 집단이었던 ‘인민의 의지’는 모든 면에서 열세였으며, 이러한 조건에서 최대한의 효과를 낼 수 있는 전술로 테러를 선택하였고, 이를 통해 자신들의 정치적 이상을 실현하고자 하였다. (식민지) 독립운동과 테러리즘 제국주의 침략자, 그리고 2차 대전 시기의 파시스트 국가들과 일본제국주의에 대항하여 싸웠던 피지배 점령지인들의 주요 저항수단도 테러였다. 제국주의 열강의 지배하에 있었던 식민지들에서 일어난 저항운동들은 물론이고, 2차대전의 와중에 독일과 일본에게 점령되었던 유럽과 아시아 각국에서 나타난 게릴라, 파르티잔, 레지스탕스 등 다양한 형태의 무장저항운동들 또한 테러(리즘)을 의도적으로 사용하였다. 20세기 초 제국주의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한 한반도에서도 이에 저항하는 다양한 형태의 운동들이 나타났는데, 무장투쟁 또한 중요한 한 흐름을 형성하고 있었다. 나라를 빼앗긴 독립운동가들은 일본과 전쟁을 할만한 정규군을 가지고 있지 못하였기에 게릴라전을 포함한 테러리즘을 일본에 저항하는 주요 수단으로 삼았다. 김구는 이 두 운동을 직접 조직하고 지휘한 인물이다. 1896년 명성황후 시해사건에 대한 복수로 김구는 일본인 쓰치다를 살해한다. 개인테러이다. 1926년 12월에는 제국주의 일본의 요인암살을 목적으로 한인애국단을 조직한다. 테러조직 결성이다. 임시정부에 몸담고 있으면서 만주의 여러 독립운동계열 무장조직들과 교류를 가졌고, 40년에는 광복군을 조직하여 무력항쟁에 적극 나선다. 게릴라전의 전개이다. 즉, 김구는 테러(리즘)을 사용하여 항일운동을 한 독립운동가인 것이다. 프랑스대혁명 기의 ‘공포정치’와 마찬가지로, 항일투쟁 기에 테러의 대상은 군인이나 정치가 등으로 제한되지 않았다. 1920년대에 김구가 이끌던 임시정부는 이른바 죽여도 되는 일곱 부류의 사람이라는 ‘칠가살(七可殺)’을 선언하였는데, 이들은 ‘일본인’, ‘매국적(賣國敵)’, ‘고등경찰 및 형사와 밀고자’, ‘친일부호’, ‘적의 관리’, ‘불량배’, ‘배반한 자’였다. 즉, 경찰이나 관리와 같은 무장병력이나 정치적 중요인사뿐만 아니라, 적에게 속한 민간인 또한 처단, 즉 테러의 대상이었다. 2007년 8월에 많은 사람들은, 김구를 테러리스트라고 인정하는 것은 테러리즘의 역사와 정의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잘못 생각하였다. 이들은 테러(리즘)의 역사적 변천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으며, 그 결과 무력의 열세로 전면전이 불가능하였던 일제침탈 기에 독립운동가들이 대일항전의 방법으로 선택한 요인암살과 게릴라전이 테러전술임을 알지 못하였다. 그러한 바탕에서 서구, 특히 미국(지배집단)의 이데올로기가 투영된 테러(리즘)에 대한 정의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 적용함으로써, 결과적으로 김구를 비롯한 항일독립운동가들의 무력항쟁을 부인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 이상에서 살펴보았듯이, ‘특정 종교나 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비합법 단체가 저지르는 민간인에 대한 폭력행위’라는 테러리즘에 대한 정의는 (적어도 아직까지는) 테러(리즘)으로 불리는 여러 현상들에 대한 많은 설명들 중 하나에 불과할 뿐이다. 테러리즘에 대한 정의는 여전히 ‘정치적’ 상황과 판단에 큰 영향을 받고 있기에, 역사적 사실들에 근거하고 보다 보편 타당한 설명이, 여전히, 필요하다.
 
 

<인터넷 칼럼>에 게재된 내용은 필자의 개인적인 의견으로

유라시아 연구소의 공식견해가 아님을 밝혀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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